"프레첼을 먹어야겠어!"
새벽 2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저희 부부는
잠시 공항 근처에서 휴식을 취한 뒤,
시간 여유가 생기자 ‘아샤펜버그(Aschaffenburg)’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오래 머물 계획은 아니었고,
중세 성 하나와 올드타운의 오래된 골목길을
그냥 조용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도시 초입에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스티븐은 주차를 하자마자 곧장 커피숍으로 향했습니다.
“프레첼을 먹어야겠어!”
그 말과 함께 프레첼 두 개를 사 들고 나오는 스티븐의 얼굴엔
살짝 들뜬 미소가 떠올라 있었습니다.
프레첼에 담긴 작은 열정
스티븐은 평소 음식을 크게 즐기는 편은 아닌데요,
유독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프레첼’이에요.
독일에 오면 어김없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빵이죠.
지난번 뮌헨에 도착했을 때도 프레첼부터 샀던 기억이 납니다.
굵은 소금이 박혀 있는 진한 갈색의 프레첼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해서,
처음 보면 누구나 눈길이 가는 빵입니다.
그렇게 기대를 안고 샀던 프레첼이었는데…
맛이 생각보다 별로였나 봅니다.
스티븐은 하나만 먹고 다른 베이커리를 또 찾아가더니
결국 세 군데의 프레첼을 맛봤습니다.
하지만 끝내 만족스러운 맛을 만나지 못했어요.
“역시 큰 도시의 체인점보다,
소도시의 오랜 베이커리가 더 맛있나 봐.”
라고 아쉬워하는 스티븐의 말에
저도 괜스레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프레첼은 독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빵이지만,
그 단순함 안에 이 나라의 일상과 정서가 녹아 있는 음식이에요.
출근길에 하나씩 손에 들고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공원 벤치에 앉아 프레첼과 맥주를 곁들이는 노부부,
마을 축제의 작은 노점마다 갓 구운 프레첼이 쌓여 있는 모습까지—
이 빵은 독일 사람들의 삶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죠.
여행자로서 그런 장면을 마주할 때면
단순한 간식을 넘어서,
이들이 살아온 리듬과 따뜻한 일상을 잠깐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여행 중 ‘프레첼을 먹는 순간’은 언제나 특별합니다.
그건 배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잠시 그 도시의 숨결을 함께 들이마시는 시간이거든요.
짧은 산책, 그리고 다음 목적지
아샤펜버그의 거리는 비에 젖어 조용했고,
붉은색 지붕 아래로는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런 적막한 분위기가 오히려 도시의 깊이를 느끼게 했습니다.
화려하거나 관광객으로 북적이지 않았기에,
그저 조용히 시간을 걷는 느낌이었어요.
우리는 오래된 교회 앞 벤치에 잠시 앉아
소리 없이 내리는 비와 함께 아샤펜버그의 풍경을 음미했어요.
여행이란 가끔은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아샤펜버그에서는
테라코타 조각상이 인상 깊었던 오래된 교회와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늘어선 골목을 잠시 걸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따로 있었지요.
스티븐이 오랫동안 가고 싶어 했던 ‘밀튼버그(Miltenberg)’.
독일을 수십 번 방문해 본 스티븐이
언제나 말하던 마을입니다.
드디어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내 폰이 어디 갔지?”
차에 올라탄 스티븐이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스마트폰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곧장 차에서 내려
잠시 전 머물렀던 커피숍과 골목들을 다시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의 휴대폰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희는 독일 현지에서 사용할 심카드를
다음 목적지인 밀튼버그에서 교체할 예정이었습니다.
부랴부랴 심카드를 사서 제 휴대폰에 심카드를 옮겨봤지만
이번엔 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희는
‘인터넷이 연결될 때만 연락이 가능한’
불편한 상태로 유럽 33일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숙소가 준 따뜻한 위로
다행히도 밀튼버그에 도착하자마자
예약해둔 숙소가 저희를 반겨주었습니다.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한 에어비앤비 숙소.
침실 문을 열자마자
작고 예쁜 마을과 숲이 어우러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와…”
감탄이 흘러나왔습니다.
긴 여행의 첫날, 피로와 당황스러움을
그 풍경이 잠시나마 덜어주었습니다.
숙소 테라스에 앉아
와인 한 잔과 음악으로 마무리한 첫날의 저녁.
이보다 더 나은 위로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작은 사고, 긍정으로 넘기기로 했습니다
스티븐과 저는 비슷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일어난 일은 긍정적으로 넘기자’는 태도입니다.
지난달 알래스카에서는 여행 첫날,
렌터카로 주차장 외벽을 긁기도 했고,
이번엔 여행 첫날부터 휴대폰을 잃어버렸지만…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잖아.
불평하지 말고, 여행을 망치지 말자.”
그렇게 저희는 서로 약속을 했고,
정말로 그렇게 했습니다.
조금 불편하긴 해도,
긍정의 힘이 여행을 지켜주는 순간이었습니다.
연재 소개글: 이상하고도 아름다웠던 33일간의 여행
4년전 저와 남편은 유럽으로 35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에서 만난 남편의 지인들과 친한 친구들, 그리고 우연히 알게된 인연들을 통해 사람의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거나, 비 인기 지역, 작은 마을들을 다니며 유럽의 문화와 풍경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이번 여행은 사람으로 인해 따뜻하고 행복했답니다. 그래서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글을 쓰기 시작했지요. 그 원고를 연재로 살짝 방출합니다. 글은 Day 1, Day2...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함께 여행하는 느낌으로 같이 다녀주세요. 다음글은 그 당시 제가 쓴 이 여행기의 첫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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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은 길었다. 33일의 유럽여행은 꽤 긴 여정이었다. 남편이 독일과 덴마크로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살짝 실망했다. 독일과 덴마크는 이미 여러 번 가보았고 나는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를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을 가고 싶다. 그런데 그는 2년 전 운명한 친구의 지인들을 만나고 싶다고, 그리고 오랫동안 못 만난 덴마크의 친구들을 보고 싶다고 한다. 특별히 고집을 부리거나 독선적인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그렇게 하자고 했다. 대신 나는 샴페인 지방과 암스테르담을 꼭 가고 싶다고 했고 스티븐이 가보지 못한 벨기에의 브뤼헤도 끼워 넣었다. 가장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 독일과 덴마크에서의 일정은 지인을 만나거나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짜였다. 그들은 모두 남편의 인맥이라 나는 좀 막연하고 불편하기까지 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하는 여행이라니... 이번 여정은 시작 전부터 약간 막연하기도 했고 무얼 기대해야 할지 몰랐던 여행이었다.

기대와 달리 여행 첫날부터 시작된 이 신기하고 아름다운 인연은 여행의 막바지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들, 지성적이지만 교만하지 않은 사람들, 진심이 통하는 우아한 사람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특별히 잘난 사람도 뛰어난 사람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하고 개성 있는 삶과 그들의 우아한 클래스. 진실되게 사는 사람이 우아한 사람이라는 걸 처음 깨닫는다. 그리고 그들의 따뜻한 진심이 전해져서 일까?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우고 깨닫고 감동하고... 각기 다른 철학으로 다른 방식으로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번 여행의 주제이자 결산은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33일간의 이번 여행의 또 다른 특색을 꼽아본다면, 그건 신비롭고 이상한 나라에 다녀온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번엔 특별히 대도시보다는 작은 마을들과 자연을 다니면서 숨어서 반짝이는 보석 같은 곳을 많이 다녀봤다. 스웨덴의 빽빽한 나무 사이로 신비롭게 펼쳐진 이끼 가득한 길. 마치 프로도와 함께 반지의 제왕을 찾아 떠나는 길, 빨간 지붕 위로 하얀 점들이 박혀있는 버섯과 보라색, 주황색, 노란색 버섯들이 가득한 동화나라 같은 스웨덴의 숲길. 라푼젤이 높게 열린 작은 창문으로 긴 머리채를 드리울 것 같은 성이 있는 독일의 중세 마을들... 모젤 강변의 포도밭과 그림 같은 마을들, 프랑스의 샴페인 농가, 이보다 더 로맨틱할 수 없을 듯한 운하들,.. 이번 여행은 주로 작고 알려지지 않은 여행지였다. 여행지가 작고 섬세하고 아기자기해서인지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성도 섬세하고 잔잔하면서도 감동스럽다. 큰 도시를 여행하면서 느껴보지 못한 신비롭고 낭만 가득했던 여행이었던 것 같다.
여행을 하면서 이 여행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33일간의 이상하고 신비로웠던 그리고 아름다웠던 여행을 이제부터 다시 시작한다.
다음 이야기: https://iliketraveling.tistory.com/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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