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랑켄 지방의 시골 마을을 여행하며 겪은 유쾌한 맥주 논쟁, 달콤한 쿠켄 타임, 따뜻한 이별의 순간까지 담은 하루 이야기.
고기로 시작하는 하루: 스티븐의 독일 음식 천국
전날 밤의 마지막 일정은 스티븐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독일 음식이었습니다. 시골 분위기의 정통 레스토랑에서요.
저는 늘 그렇듯 독일 음식이 입맛에 잘 맞지 않아요. 고기, 특히 돼지고기 위주인 메뉴가 많다 보니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죠. 다행히 민물 생선 요리가 딱 하나 있어서 그걸 시켰습니다.
반면에 스티븐은 메뉴만 봐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더군요. 고기 요리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결국 돼지고기 스튜를 시켰고,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시골 로컬 식당은 원래 맛있는 법이죠. 현지인이 데려가는 곳이라면 백 퍼센트 믿을 만합니다.
스타일리시한 드라이브: 중세 감성 마을 투어
울리를 중심으로 모인 저희 8명은 두 대의 차로 프랑켄 지방의 짧은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차들을 보자 약간의 속물근성이 고개를 들더군요. 벤츠, 포르쉐, BMW.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마음속에서 '이 차 타고 여행이라니, 괜찮은데?'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씨기가 미리 계획해둔 일정에 따라 독특하고 매력적인 마을들을 방문했어요. 중세의 멋이 살아 있는 마을들로, 라푼젤이 머리를 내려주길 기다릴 것 같은 둥근 탑, 장난기 많은 요정이 살 것 같은 뾰족한 탑, 돌길, 그리고 좁디좁은 삼각지붕 이층집 등, 볼거리가 가득했습니다.
맥주와 역사, 그리고 중학생때 들었던 가짜 뉴스
걷다 보니 맥주 타임이 되었습니다. 마인강 줄기를 따라 있는 작은 공원의 푸드트럭 같은 곳에 잠시 멈췄어요.
잔디 위에 야외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사람이 거의 없어 여덟 명 모두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기에 딱 좋았습니다.
마인강은 생각보다 꽤 좁았지만, 길쭉한 배들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고,
강 건너편의 숲과 우리가 앉아 있던 잔디, 그리고 파란 하늘이 어우러져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맥주를 별로 안 좋아해서 평소처럼 물을 시켰습니다. 주스를 마시고 싶긴 했지만 혈당 생각에 생수를 선택했죠.
그런데 그때, 저도 모르게 중학교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저… 중학교 때 독일이 수질이 나빠서 맥주가 발달했다고 배웠는데, 사실인가요?”
…정적.
순간, 여섯 명의 독일 친구들이 동시에 저를 쳐다봤습니다. 표정은 말 그대로 “이게 무슨 소리야?”였고, 스티븐조차 아무 말도 못하더군요.
‘큰일 났다’ 싶은 마음에 스티븐을 바라보았지만, 그도 난처한 눈빛.
그때, 제 머릿속에 기적처럼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아! 저도 사실 독일 수돗물이 너무 맛있어서 놀랐어요. 그래서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그리고요, 저희 학교에서도 배웠는데, ‘라인강의 기적’ 덕분에 전후 독일이 빠르게 복구됐잖아요. 독일 국민의 단합과 성실함이 한국에도 큰 귀감이 되었고, 저희도 ‘한강의 기적’을 이뤘어요.”
이 말이 통했는지, 모두들 다시 웃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때 배운 교과서가 원망스러웠죠. 가짜뉴스, 정말 싫습니다.
인생은 결국 쿠켄 타임을 향해서..
그리고 드디어, 오후 4시쯤, 독일 여행 최고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쿠켄 타임!
(쿠켄Kuchen은 독일어로 케이크예요.)
이 전통이 독일 전역에 퍼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피터와 일세는 매일 오후 3~4시에 반드시 커피와 케이크 타임을 가집니다. 아침은 10시쯤 느긋하게 먹고, 점심은 생략하거나 가볍게 하고, 그 대신 이 시간에 진하게 달달한 한 조각의 여유를 즐기죠.
저는 이 패턴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케이크는 정말 맛있었어요.
씨기와 르나테가 데려간 디저트 카페는 그야말로 천국이었어요. 온갖 종류의 케이크가 통째로 진열되어 있었고, 그중 하나를 고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죠.
어김없이 피아가 옆에 와서 이것저것 추천해주고, 일세도 한마디 보탰습니다.
결국 피아의 추천을 받아 선택한 케이크는… 말 그대로 완벽했습니다. 다른 맛도 궁금해서 추가로 몇 개 더 시켜 나눠 먹었고요.
이곳 케이크 중에는 술이 들어간 것도 많았지만, 저는 알코올 프리 버전만 골라 먹었습니다.
와인색 두루마리와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별
마지막 마을을 둘러본 후, 저희는 비어가든에 들렀습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피터와 일세, 피아와 마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두 시간 넘는 거리를 운전해 돌아가는 일요일 저녁. 아쉬운 마음 가득 안고 마지막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때, 피아가 조심스레 가방에서 와인색 두루마리를 꺼냈습니다. 펼쳐보니 멕시코 스타일의 다채로운 그림 두 장이 나왔어요. 울리의 유품 중 일부로, 저희에게 추억으로 나눠 주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뭉클함이 훅 밀려왔습니다. 피아는 참으로 섬세하고 따뜻한 사람입니다.
여행 내내 식사비, 맥주, 와인 등 모든 비용을 스티븐과 실랑이하며 본인이 내겠다고 고집했죠. 미국에서는 친구들끼리도 보통 더치페이를 하는데, 피아는 우리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이별이라고 하기엔 너무 따뜻했던 그 순간.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알기에 더 소중했던 작별이었습니다.
저희는 내년에 크리스마스 마켓 시즌에 다시 독일을 방문할 계획이고, 그때 또 피터와 일세의 집에 머무를 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그분들의 따뜻함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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